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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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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 == >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 발췌 3월 16일 C 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으나 이미 베트콩 및 그 동조자는 다 도망간 상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 상식적으로 보면 먼저 주민들을 강제 소개한 다음 마을을 불태우고 조사에 들어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루이나 육군 장병들은 가옥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리고 후의 [[청평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연상될만큼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에 참여한 40명 이상의 군인들은 논과 수풀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성별과 나이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으며 사람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참수하는 방식으로도 죽였고 총을 쏘기 전에 신체를 절단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그룹으로 모으고 M79 유탄발사기를 쏘거나 우물에 던진 후 그 우물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으며 도망치는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추격해서 사살했고,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성까지 봐주지 않고 살해했다.[* 심지어 데니스 콘티(Dennis Conti)가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 위에 몸을 던져서 아이들은 처음에는 살아 있었는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일어나자 윌리엄 캘리 중위가 그 아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고 한다.''' 덤으로 캘리는 2살짜리 소년이 도랑에서 기어나오자 그 소년을 도랑에 다시 밀어놓고는 총을 쏴 죽이기도 했으며 캘리 휘하의 군인들은 모유를 수유받는 아기와 '''갓 태어난 아기'''를 총살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캘리 중위가 직접 죽인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집단 강간 및 성고문을 당했으며[* 심지어 '''출산 예정일이 임박한 임산부'''까지 강간하고 총검으로 배를 가르기도 했다.] 가장 어린 성폭행 피해자는 12세였다. 그리고 학살 과정에서 군인들은 미라이 마을에 있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민간인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학살에 대한 공식 성명은 '''베트콩 128명을 작전 과정에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게릴라의 특성상 민간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많고 개중엔 여성들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애초에 이 사건은 아이들이 베트콩에 동조한다는 물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성폭행과 같은 전쟁범죄 앞에서는 '민간인처럼 보이는 게릴라들에 시달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적절하지 않았다.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또''' 학살을 저질렀다. 단 '''4시간이라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두 마을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47명에서 504명 사이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있는 선루이나 학살 박물관에서는 총 504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504명(남성 231명+여성 273명[* 임산부 17명 포함])의 이름이 다 적혀 있다.[* 참고로 학살 피해자 중 절반이 넘는 259명이 20세 미만이었는데 정확히는 13~19세는 49명, 8~12세는 91명, 4~7세는 69명, 3세 이하는 50명이었다. 그리고 84명은 20~30대였으며 101명은 40~50세였고 60명은 60세 이상이었다.] 참고로 당시 미라이 마을에는 고작 '''507명'''만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나 육군 항공대의 UH-1 헬리콥터를 조종하며 상공을 비행하던 항공준사관 휴 톰슨 주니어(Hugh Clowers Thompson, Jr.)와 승무원인 상병 로렌스 콜번(기관총 사수 ) 및 상병 글렌 안도레타 세 명이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톰슨 준위는 '''열받아서 콜번 상병에게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11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파일:777px-UH-1_inflight_colour_photo.jpeg|width=500]] UH-1은 다목적 용도의 중형 헬기였기 때문에 11명을 구조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캘리 소대의 한 병사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에 총을 쏜 후 적 무기를 3개만 노획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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